비는 그치고 구름은 여전히
햇살이 내려올 공간을 내놓지 않는다.
어리석은 예보라 비웃는가 가늠할 수 없는 속도
가늠할 수 없는 수량의 비가
붉은 꿈 걸린 고추밭
검푸른 핏줄 쌩쌩한 다리 곧추세운 벼논
모조리 휩쓴 뒤
보잘 것 없는 내 일생의 바람을 막아주던
둑이 무너진 자리에 웅덩이만 깊다.
먼 길 뿌리째 휩쓸려와 뼈만 남은 느릅나무
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풀들
스스로 흐르지 못한 것들이 고이는 이 얕은 곳
썩어가는 물 속에서도
지난 시간을 버릴 줄 아는 유충들은 떠나고
오십 년 세월이 무리였나
도무지 살 것 같지 않은 느릅나무 다시
실뿌리를 내리는 웅덩이를 바라보다
좀처럼 펴지지 않는 무릎을 쥐어잡고
몸을 일으켜 걷는다. 한 걸음 또 한 걸음
삐걱 삐걱 걷고 또 걷는다.